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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야기

잊혀지지 않는 샌드위치..

지금으로부터 십수년전 처음으로 태평양을 건널때의 이야기이다. 복학은 했으나, 도대체 강의를 알아듣기가 쉽질 않았다. "내가 이정도로 금강석이 되었더냐"하는 자괴감과 함께 뭔가 나 자신을 각성시킬만한 껀수를 찾고 싶었다. 그래서 야간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으며, XX아동복지회에 신청을 했다.
"입양아 인솔자" - 비행기 값을 절약하기위해.

고등학교때부터 여행이라면 자신이 있긴 했지만, 막상 해외로 입양되어가는 어린애들을 어떻게 감당해야할지 대책이 서질 않았다. 그래도 우여곡절끝에 교육을 마치고, 공항에 도착해 보니, 생후 4-5개월 부터 9살까지의 6명의 아이들이 보였다. 마침 겨울이라 나도 잠바 한개를 걸쳤고, 그 아이들도 입양기관 혹은 고아원에서 해준 겨울옷을 입고는 있었지만, 낯선 여행이 부담스러운듯 계속 걱정스런 시선으로 나와 또 다른 아주머니 (다른 인솔자)를 주시했다.

이윽고, 서북항공(노스웨스트)이 일본을 경유지로 해서 김포를 출발했고, 그걸 시작으로 시카고 오헤어 공항까지 장장 열몇시간을 거의 앉아보지도 못하고 식사도 거른채 혼자서만 이리뛰고 저리뛰면서 6명을 뒤치닥거리 했다. 동행인 아주머니는 동경에서 이륙하면서부터 내리 자기만 했다. 승무원조차 우리와 일행이 아닌줄 알정도로. (그땐 참 섭섭했지만, 너무 애들 뒤치닥거리에 정신이 없어서 생각도 못했다.) 제일 큰 여자아이 (9살) 가 그래도 눈치가 빤해서 내가 기저귀를 갈때, 다른 젖먹이가 울기 시작하면, 젖병을 물려주곤 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자느라 좀 한가해지면, "아저씨 앉으세요" 하며, 나와 이런 저런 지나온 얘길 하기도 했다.
(참고로, 입양아 인솔자는 좌석이 없다! - 얼마나 놀랬던지)

몇명의 동남아 여자 승객들과 여승무원 (한국인은 한명도 없었음)이 번갈아 와서 가끔씩 젖먹이 아이 3명이 너무 울면, 도와주곤 했다. 이 아이들은 대부분 "장애자"였고, 한국이란 땅은 그들이 앞으로 인생을 헤쳐나가기에는 몹시도 어려운 약속받지 않은 땅이었고, 그들역시 부모에게서조차 "초대"받지 않은 자식이었던 것이다.
쉽게 말해서 육손이, 사시, 언챙이, 지독한 피부질환 등등으로 무장한 이 아이들을 보며, 잠시 쉬는 시간에도 마음이 착잡했다.

이윽고 오헤어 공항에 도착하자, 지금 생각해보면 공항내의 EMS(Emergency Medical Service) 팀들이 올라왔다. 아무도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가장 먼저 올라와서는 아이들을 검사했다. 그리고는 자기들이 가져온 담요에 젖먹이 아이들을 한명씩 안고는 나가면서 나와, 아주머니더러 따라오라 했다.
아이들 서류가 든 봉투를 들고 그들을 따라가보니, 공항 한켠에 따로 의료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거기서 모든 아이들을 완전히 벗긴후, 씻기고 나서, 철저하게 검사한후, 양부모들이 가져온 옷을 입혔다. 서류와 함께, 내가 입양기관에서 가져온 옷을 건네주니까, 간호사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씩 웃더니, 건물 한쪽을 가리키면서 이 옷들을 쓰레기 통에 넣었다. 참 기분이 상했다. 왜 새옷들을 쓰레기 통에 넣었을까 하며 그쪽을 보니, 한무리의 사람들이 이쪽을 보며, 손을 흔들며 웃고 있었다. 이들을 입양한 양부모들이었다. 그들은 아이가 검사가 끝날때까지 거기서 대기하면서 자기네가 건네준 새옷을 입고 나올 "New Family Member" 를 기다렸다.

서류 및 인도절차가 다 끝나고, 아이들이 양부모들에게 인계되어지기 직전, 일행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9살 여자아이는 겁먹은 얼굴로 내게 말했다.
"아저씨, 새엄마, 새아빠한테 얘기 좀 해주세요. 말 잘들을테니까 한국으로 다시 보내지 말라"는 그런 얘기였던거 같았다. 그 순간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군 생활중에도 한번도 안흘렸던 눈물이다.
아이를 안심시킨후 대기실로 나가니, 입양아들을 안아든 양부모, 또 그의 식구들은 좋아서 어쩔줄 몰라하며 물고 빨고 난리부르스다. 그중에서 난, 9살 영순이(가명)의 양부모를 쉽게 찾을수 있었다. 그들은 영순이를 데려오기위해 2년여를 기다리며 편지 및 사진교환을 통해 영순이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영순이와의 첫만남을 즐기던 그들은, 내게 다가와 진심으로 고맙다며 내 스케줄을 물었고 또 자기집에서 며칠 자고 갈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럴수는 없지만 몇가지 얘기하고 싶다고 하니, 좋다고 하며 그렇지 않아도 혹시나 해서 자기네가 먹을걸 준비해 왔는데 좀 먹으면서 얘기하지 않겠냐고 했다.
그러고 보니, 기내에서 몇번의 식사가 있긴 했지만, 애들 뒷치닥거리 하다보니 놓치기도 했고, 또 기저귀 몇번 갈다보니 총각으로선, 입맛이 그리 땡기지 않은점도 있었다.

대기실 한쪽 테이블에가서 그들이 준비해온 ""something to eat"을 보니 무슨 샌드위치와 숲이었는데, 무척 고마왔다.

여행으로 인한 긴장이 풀리고, 또 두어시간을 대기해야 할터이니 먹어두는게 좋을거 같았다. 몇입 베어물고 나서, 양부모들에게 물었다. 영순이가 잘 적응을 할런지 어떨런지, 문화적 충격이 클텐데, 등등...
그들은 이미, 영순이의 적응기간을 고려한 특수학교 스케줄을 준비하고 있었고, 여섯개의 손가락 수술도 정밀검사후에 실시할거 라고 했다.
또 한번 뭉클한게 가슴 한구석에서 올라왔다.
샌드위치는 참 맛있었던 거 같다. 숲도 따뜻했고.
그러나, 더 이상 넘길수가 없었다.

하얗게 빛나던 대기실의 형광등 불빛과, 하얀 벽, 유리창 너머로 보이던 공항 한쪽에 쌓인 산같은 눈덩이들, 그리고 유난히 난방이 잘 되어 반팔 티셔츠를 입고있던 양부모를 뒤로하고, 배낭여행 아메리카 두달간의 여정에 올랐다.
그리고, 다시는 입양아인솔을 나서지 않았다. 아니 할수가 없었다.

그러나, 신문이나 티브이에서 입양아 이슈가 나올때면, 나도 모르게 가슴 한쪽이 아리면서, 오헤어 공항 대기실에서 먹었던 잊을수 없는 샌드위치가 생각난다.
언제나, 그 나머지를 먹을수 있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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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석이네 커뮤니티에서 퍼왔습니다..
요즘 자꾸 따뜻한 얘기가 들리는 것 같아서 마음이 이상합니다.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을 때부터 비극은 시작됐지만..
종종 그 비극은 누구도 예측못한 해피엔딩으로 끝나곤 하지요..
하나님의 아들의 고난, 죽음이 온 세상에 구원의 소망을 주었던 것처럼..

가끔 상상해봅니다..
내가 그 극적인 반전의 주인공이 되는 상상을요..
모두가 반대하겠죠.. 비극으로 치닫는 이야기를 돌려놓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하거든요..

사랑은 희생이라고도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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