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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중

우는 아이를..

우는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칭얼거리고 짜증내고 울어대는 아이를
좋아하고 더 예뻐하고 사랑을 주는 부모도 없습니다.
아무도 우는 아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는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며 이야기를 하던 중
한 목사님이 “우는 아이를 좋아하는 분이 계시죠”라고 응수했습니다.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옳은 말인지 모릅니다.

상한 심령을 원하시고 우는 자식을 원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참 이상한 하나님 아니신가?
왜 우는 사람을 좋아하시나?
왜 고통당하는 사람을 오히려 기뻐하시나?
그 이야기를 하고 헤어진 후 오후 내내 그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차이.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
우상을 만들어 파는 아버지를 둔 아브람을 불러
열국의 아버지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
거짓말쟁이요,
간교하기 이를 데 없는 야곱을 편애하시는 하나님.
살인자인 모세를 불러 훈련하시고
민족 대 이동을 위해 지도자로 세우시는 하나님.
범죄한 다윗의 위를 언약을 지키시면서 지켜 가시는 하나님.
아들을 못 박아 죽이셔서라도
자신의 택하신 백성들을 용서하시고 곁에 두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
무지하고 못난 사람들이라고 여겨지는 백성들을 찾아가
복음을 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 아니시던가?

우리, 아니 저의 모습을 봅니다.
어디 의가 있나?
거룩하길 하나?
순결하기를 한가?
그런 우리(나)를 기어코 당신 품에서 쉬게 하시려고
끝없는 눈물과 아픔을 참으시고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에 오늘도 머리를 숙이게 하십니다.

“어떻게 여기서 믿음을 지켰냐?”고 묻는 저에게
북한 성도는 “아직도 멀었다오!”라고 답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어떻게 그런 환경에서 믿음을 지켰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자유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발버둥치고
밥 한 그릇보다 거짓말 도둑질을 하지 않으려 하며
공산당 당원 자리보다 예배드리는 것을 원하는 사람들은 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일과 순교를 차라리 택하는 성도들은
지금도 1년에 16만명씩이나 됩니다.
모슬렘과 천주교와 무신론자들이 그런 방법으로 기독교인들을 박해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주저하지 않으시고 바로 이렇게 울고 고통당하는 자들의 편에 서십니다.
저도 그 편에 서기를 원합니다.
순교당하며 고문당하더라도 끝내 주님이 편들어 주실 그 자리에 서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서는 70년만 살면 되지만 천국에서는 영원히 살게
될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더 많은 아픔이 그리고 고난과 환난과 핍박이 있어도
주님의 사랑에서 저를 끊을 자가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35절은 주저없이 고백합니다.
누가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라고 말입니다.
바울의 고백이 바로 저의 고백이 되었음을
저는 오늘도 확인하고 있습니다.

저는 차라리 우는 아이가 되어 주님의 사랑을 받고자 합니다.

순례자의 길을 가는 무익한 종 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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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퉁이돌에서.. 퍼옴..
메마른 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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